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(문단 편집) === [[루이필리프]] === 부르봉 왕가의 친척이지만 왕위를 노리고 혁명에 가담한 부르봉-오를레앙 가문[*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[[루이필리프 2세|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]]는 왕위를 탐내 [[프랑스 혁명]] 때 친척인 [[루이 16세]]와 [[마리 앙투아네트]]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져 프랑스 전역을 [[충공깽]]으로 몰아넣었고, 그렇게 욕을 퍼먹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왕이 되기 위해 혁명 정부 치하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해에 똑같이 단두대에서 참수당하게 된다.]도 원수로 여겨 [[루이필리프]]와는 망명지에서도 만나주지 않을 정도였다.[* 애초에 루이필리프는 아버지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망명 시대 당시에 마리 테레즈뿐만 아니라 부르봉 왕조 전체에게 왕따당하다시피 했다.] 마리 테레즈는 어릴 때부터 오를레앙 공작은 물론 그 아들도 항상 불신하고 의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루이필리프는 대를 이어 사촌들의 통수를 쳐버리며(...) 프랑스 왕위를 차지했다. 정작 루이필리프도 [[1848년 혁명]]으로 폐위되면서 영국으로 망명했고 결국 복위되지 못한 채 영국에서 사망했다.[* 게다가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직계 남성인 [[앙리 5세|샹보르 백작 앙리]]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, 재위 내내 부족한 정통성으로 전 유럽의 왕실에게 찬탈자이자 폭동왕이라고 욕을 먹어야만 했다. 하지만 샹보르 백작 앙리의 죽음으로 남계가 끊겨 단절되어버린 부르봉 왕가의 직계와 달리, 루이필리프가 무려 6남 4녀의 많은 자녀를 둔 덕에 오를레앙 가문은 루이필리프가 폐위된 후에도 상당히 번성했고 타국 왕가와 혼맥을 맺으면서 나름 잘 나갔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